2007년 05월 08일
26의 본분
어제는 고등학교 교사이신 20대 후반의 선배님 두 분을 만났다. 선배들은 5월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대체 왜?
생각해보니 5월은 행사의 달이었다. 중간고사에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석가 탄신일까지!
만에 하나, 나도 내년에 5월이 영원하길 바라게 될까?
어제 마신 알콜 탓에 늦게 일어나 하루 종일 집에서 비비적거렸다.
엊그제가 어린이 날이었고 곧 어버이 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5일과 8일 사이를 굳이 헤아리지 않는 나는 사실 내일이 어버이 날 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엄마는 저녁 때 퇴근하고 돌아오시더니 카네이션도 안 사놓은 나를 맹렬히 비난했다.
누구네 딸내미는 멀리 살면서도 집에 뭘 보냈다는데 넌 하루 종일 잠만 퍼자고 뭐하는거냐?
내일 밤이 되야지 그제서야 꽃 사놓으려고? 아빠는 나가서 무슨 얘길 하냐? 아침에 꽃도 하나 못 달고 출근하게 할거지?
거기에다가 아침에 잠에 취해 비몽사몽인 내게 신발장에 있는 뭐 치워놓으라고 시켜놓고선 내가 기억 못해서 안 한 것에 대해서 엄청난 잔소리를 퍼부었다.
대체 나는 왜 이런 비난을 들어야 하는걸까?
무신경하고 멍청한 나는 확실히 못난 딸이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준다고 믿었던 엄마였는데 이런 식으로 할큄당하고 나면 정말이지 유치하게도 인생 막 살고 싶어진다. 푸훗!
억울한 마음에 울컥해서 눈물을 흘리며 한자를 막 외우다가 그래도 카네이션은 사야겠다는 생각에 저금통을 뜯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놓지 않아서 현금이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황금 돼지에는 동전이 제법 모여있어서 바구니에 담긴 카네이션 정도는 살 수 있었다.
천 원, 이 천원, 동전을 헤아리고 있는데 아빠가 창 밖에서 날 보시곤 말씀 하셨다.
"뭐하냐? 니가 지금 동전이나 세고 있을 때냐?"
아...... 나는 어찌해야 좋을까.
곧 이어 들리는 아빠의 목소리.
애가 왜 저 모양인지 몰라. 혀를 끌끌 차는 소리.
나도 도대체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는건지 알 길이 없다.
난 매일 악몽을 꾼다.
아무도 알아 줄 리 없는 꿈 속에서 방귀나 뀌고 트름이나 끅끅 하며 바나나를 앉은 자리에서 서너개씩 먹어치운다.
아빠는 여전히 야구 중계를 보기 위해서 내가 보던 만화 채널을 휙 돌려 버리는 사람이다.
엄마는 내가 아무리 배부르다고 해도 우격다짐으로 밥을 다 먹여놓곤 넌 너무 뚱뚱하다고 비웃는다.
카네이션은 왜 사야 하는지 모르겠고,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일어나서 뭘 해야 할지, 친구를 만나면 뭘 먹어야 할지 아무것도 결정을 할 수가 없다. 모든게 흐릿하고 희미하고 내 손에는 잡히지 않는다.
나는 남들에게 눈물로 하소연 할 만한 그 어떤 어려움도 겪어 본 적 없이 자라났다. 그래서 더더욱 스물 여섯이라는 내가 갖고 있는 희미한 존재감과 확연한 무능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늘어져있다. 그저 그런 병신 같은 여자애로 사는 것도 은근히 낭만적이지 않나 싶었다. 눈물을 질질 짜고 자학을 일삼으며 방문을 걸어 잠근 채 퉁명스런 얼굴로 시간을 보내는 반항아의 냄새를 풍기며 세대의 전형에서 벗어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멋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평범한 서민에서 중산층의 문턱을 간신히 밟으신 부모님에겐 연봉 2천이상은 벌어오며 어버이 날에는 그럴 듯한 선물도 할 줄 알고 아버지의 차를 새걸로 바꿔주려고 적금도 들 줄 아는 딸내미가 필요하다. 스물 여섯 먹은 나는 사지도 멀쩡하고 서울 소재의 사년제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러하지 못하고 있다.
간단하다. 언제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그 간극을 좁히려고 무던히도 울면서 달려보았지만 아직 반환점도 못 돈 상태다. 초코파이는 맛있고 물은 시원하기 때문에.
# by | 2007/05/08 00:25 | 끙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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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서도 진짜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다가 부모님이 기름을 부어주셔서 엄청 울컥한 글을 쓰긴 했죠. 그렇지만 어머니께서는 뒤끝이 없으셔서 금방 아무렇지 않아지죠. 어머니는 엄청 긍정적인 분이라서 다음날 엄마랑 10분만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엄청난 행복이죠.
연봉 2천에 연연하는건... 사실 그 금액이 중요한 건 아니죠. 다만 부모님께서 자식 농사 잘 지으셨다는 증거물로, 어디 나가서 자식 이야기로 1시간은 떠들 수 있을 만큼 제가 나이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얻어야만 한다는 갑갑한 책임감 때문이겠죠. 뭐 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비교적 등따시고 배부른 편이라서 이런 고민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바보짓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날 사랑하더라도 나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너무 강한 의존성은 무관심만큼 좋지 않다고 봅니다. 스스로 원하지도 않는 것을 부모님 때문에 과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과도한 압박을 받고 있거나, 부모님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희생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로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나중에 부모님 때문에 원하는 것도 못하고 살았다고 후회하며, 부모님은 자식 외에는 취미도 삶의 즐거움도 없어서 쓸쓸한 노후를 보내게 될테니까요.
뭐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 역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모님께 의존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 부모님이 원하는 건 안들어주는 초불효자) 내 부모님을 포함해서 많은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저는 제 맘대로 살겁니다. (어이;) '자식 소용 없다' 고 자주 말씀하시지만 그러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으신 분들이라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 소용 없는 것 아시고 스스로를 위해 사셨으면 합니다. (물론 전 정말 큰일 납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큰 문제는 역시 '초코파이는 맛있고 물은 시원하기 때문에' 같아요. (먼 눈)
후후후... 근데 요새 초코파이보다 맛있는거 드림파이같은거 너무 많아서!
다 먹고만 싶네요.